[항해의 이해 10] 교역항의 개발 (5) > SNS속 이어도

본문 바로가기
          • 여기는  대한민국 이어도  입니다
          • IEODO


             

            [항해의 이해 10] 교역항의 개발 (5)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70회 작성일 23-11-17 11:21

            본문

            14. 강원도·함경도 지역


            삼척항은 신라의 수군기지 겸 교역항으로 개발되었다. 


            0d1f469959b8ad4074caa9ab892010f7_1700187519_4072.png
            [신라시대 지증마립간, 사진: Wordrow] 


            512년(지증마립간 13)에 하슬라 군주 이사부가 전선을 동원하여 우산국을 정벌하였는데, 그 출항지가 실직주(悉直州, 지금의 동해시 삼척)였을 것으로 보인다. 


            강릉 부근에는 양호한 포구가 없을 뿐만 아 니라 울릉도에서 가까운 동해안 포구로는 삼척항 뿐이다. 


            이사부는 삼국시대 신라의 실직주 군주, 병부령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생몰년은 미상이다. 신라에서 군현제가 실시되어 최초로 실직주가 설치되자 그 곳의 군주가 되었고, 512년(지증왕 13)에는 우산국의 항복을 받아냈다. 541년(진흥왕 2)에 병부령이 되어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545년 왕에게 건의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충돌하는 틈을 타 한강 상류지방을 경략하여 신라 영토를 크게 넓혔다. 562년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고 출정하여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낙동강 하류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또한 울릉도는 삼척항에서 정동쪽으로 78해리 거리에 위치하여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삼국시대 선박으로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정방향 대양항해술로 이동하여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사부의 수군들은 군사기지와 안전한 포구를 갖춘 삼척항에서 출항하였을 것이다. 


            0d1f469959b8ad4074caa9ab892010f7_1700187651_6737.jpeg
            [이사부장군, 사진: koreaura] 


            강원도 고성군 장전포가 고구려의 교역항으로 개발되었다. 


            『삼국유사』 내물왕과 김제 상전에 의하면,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신라 눌지왕의 동생 보해(『삼국사기』에는 복호)를 412년에 박제상이 구하여 올 때, 고성 포구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0d1f469959b8ad4074caa9ab892010f7_1700187544_1243.jpg
            [산과바다가 모두 있는 고성군, 사진: dgram] 


            장전포는 고성 군내에서 가장 양호한 포구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예로부터 해로를 이용하여 금강산을 관광하려는 사람들의 상륙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고구려는 진흥왕의 북진 으로 6세기 중엽에 장전포를 신라에게 빼앗겼다.  

            즉 556년에 신라가 동해안의 고구려 땅을 점령하고 비열홀주(比列忽州,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군)를 설치한 후 동해안을 계속 북상하여 함경남도 이원 지방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비열홀주 (比列忽州)"


            신라시대의 지방행정구역. 지금의 함경남도 안변 일대에 설치되어 있었다. 비열홀은 본래 고구려의 군(郡)의 하나로 이곳에 설치되었는데, 신라가 진흥왕 때 이곳을 장악하면서 주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일찍이 300년(기림이사금 3) 2월에 신라의 국왕이 이곳을 순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곳이 신라의 영토가 된 것은 진흥왕 때의 일이므로 이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은 556년(진흥왕 17)에 이 곳에 주를 설치하고 사찬(沙飡) 성종(成宗)을 초대 군주(軍主)로 삼았다. 561년에 건립된 창녕의 신라진흥왕순수비에 나타나는 이른바 사방군주(四方軍主) 가운데 하나인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의 ‘비리성’은 바로 이 비열홀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 뒤 568년 10월 이를 없애고 대신 강원도 고성을 치소(治所)로 한 달홀주(達忽州)를 두었다. 그러다가 668년(문무왕 8) 3월 기존의 우수주(牛首州 : 치소는 春川)를 없애는 대신 다시 비열홀주를 설치하고 파진찬 용문(龍文)을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또 673년에는 비열홀주를 없애고 다시 우수주를 두었다. 신라의 동부 지방에서 이처럼 주가 자주 변동되었던 것은 그 때마다의 군사·정치적인 상황의 변화에 따라 신축성 있게 이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효소왕 때 이곳에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180보(步)였다. 경덕왕 때 지명을 개정하면서 이 곳의 명칭을 삭정군(朔庭郡)으로 바꾸었으며, 그 뒤 ‘비열홀’이라는 지명은 행정 구역 명칭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리하여 신라 진흥왕은 568년에 황초령과 마운령에 각각 순수비를 세웠다. 

            그러나 그 해에 신라가 비열홀주를 폐지 하고 달홀주(達忽州,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를 설치하였던 것으로 보아 비열홀주 지역은 다시 고구려가 점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진흥왕 (眞興王)"

            진흥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재위: 540~576) 왕이다. 재위 기간에 불교를 진흥하는 한편, 화랑도를 창설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흥왕은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이전보다 3배나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다.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551년에 개국(開國)으로부터 정국 운영을 주도한 중요한 역할을 한 신라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540년대 후반에서 551년 사이에 신라가 충청북도 단양 지역에 진출하였고, 이어 충주 지역까지 진출했습니다. 550년에 신라는 고구려의 도살성과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여 차지하고, 청주 지역도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하였습니다. 551년에 고구려의 내분을 이용해 백제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공격하여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였고, 이어 553년에 한강 하류 지역도 차지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하여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554년에 백제는 왜와 대가야와 연합하여 관산성을 공격했지만 패배하였고, 이후 신라는 한강 유역을 확고히 확보하였습니다. 562년에 이사부가 대가야를 멸망시키고 가야 소국들을 정복하여 가야 지역을 모두 신라의 영역으로 포함시켰습니다. 556년에 비열홀주를 설치하여 동북으로 확장하였고, 568년에는 함경남도 영광군 황초령과 이원군 마운령까지 북진하여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이로써, 진흥왕은 신라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삼국 통일을 위한 기반을 다졌습니다.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불교를 받들고, 말 년에는 스스로 승복을 입고 법호를 법운(法雲)으로 바꾸었습니다. 그의 왕비 역시 불교를 신봇하고 영흥사에 거처했으며, 진흥왕은 재위 기간 동안 불교를 진흥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흥륜사를 완성하고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중국 남조의 승려 각덕과 승려 명관을 귀국시켜 불교 교리의 발전을 촉진했습니다. 또한, 진흥왕은 정치적 활동 외에도 불교의 성장과 확장을 촉진하였으며, 이로써 그의 재위 기간은 불교에 대한 지원과 성장의 시기로 기억됩니다. 545년에 진흥왕은 『국사(國史)』를 편찬하기 위해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를 시작하게 했으나, 이 작품은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진흥왕은 화랑도를 창설하여 인재를 선발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화랑도의 구성원은 전사 집단으로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진흥왕은 가야금을 신라의 대악으로 채택하고, 가야금 연주를 널리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576년에 사망하고, 이후 아들인 사륜(진지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후 고구려와 신라는 비열홀주와 고성 지역을 중심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싸움을 전개함으로써, 고구려는 이 지역에 안정적인 포구를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비열홀에 인접 한 영흥만(원산항)에서 훨씬 더 올라간 함흥 지역에 안전한 포구를 확보하였을 것이며, 그 시기는 570년대이다. 



            0d1f469959b8ad4074caa9ab892010f7_1700187564_4793.png
            [대동여지도 중 함경남도 함주, 흥남, 함흥 부분,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함흥 지역의 교역항은 고구려와 일본과의 교류에 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하면 아래의 표와 같다.


            0d1f469959b8ad4074caa9ab892010f7_1700187601_2421.png
            [지역별·시대별 교역항 개발 종합표] 

            [지역별·시대별 교역항 개발 종합표]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단법인 이어도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