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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의 해양역사] 한산대첩과 그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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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9회 작성일 23-11-27 09:32

            본문

            임진왜란 시작전의 상황


            임진왜란이 시작되기 바로 전, 조선 정부는 남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를 선발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이순신과 이억기가 전라좌우수사로 임명되어 전쟁 준비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약 1년간 전쟁을 위한 준비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시작되자, 경상도 지역의 상황은 좋지 않았습니다. 다대포첨사 윤흥신과 부산첨사 정발과 같이 싸우다 사망한 지휘관들이 있는가 하면, 경상도좌병사 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과 같이 전투를 피해 도망친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이 전쟁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 역시 부임 초기라 효과적인 지휘를 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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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문 위키백과에 실린 "忠武公李舜臣像"] 


            'Yi is regarded as one of the greatest naval commanders in history, with commentators praising his strategic vision, intelligence, innovations, and personality.'


            이순신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 지휘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평론가들은 그의 전략적 비전, 지능, 혁신, 그리고 개성을 높이 평가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Yi_Sun-sin#cite_note-5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원균이 10척의 일본 군선을 파괴한 것을 제외하고는 주요 해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의 전략은 육지 전쟁에 중점을 두었으며, 해전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조선 해군과의 전투보다는 병력 운송과 보급로 차단에 있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경상좌수영과 주변 지역을 점령했으나, 조선 해군과의 직접적인 해전은 피했습니다. 이는 원균에게 상황을 분석하고 지원을 요청할 시간을 주었고, 이순신에게는 수군 세력을 정비하고 강화할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이 기간 동안 새로운 무기를 시험하고, 해군을 모집하며, 정찰 활동을 벌이고, 함대를 집결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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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영주가 이끌던 왜군, 그림: kscoramdeo]  


            이순신의 출전


            임진왜란 직전, 조선 정부는 남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지휘관을 선출했고, 이순신과 이억기가 전라좌우수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들은 전쟁 준비에 약 1년을 할애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초기, 경상도에서의 상황은 불리했습니다. 윤흥신과 정발과 같이 전투에서 사망한 지휘관들이 있었으며, 이각과 박홍과 같이 전투를 피한 지휘관들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군이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원균은 효과적인 지휘를 하지 못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원균이 10척의 일본 함대를 파괴한 것 외에 양측 해군 간의 주요 해전은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의 전략은 주로 육지 전쟁에 중점을 두었고, 해전 경험이 부족했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 해군과의 전투가 아니라 병력과 군수품의 운송 및 보급로 차단에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해군은 경상좌수영과 주변 지역을 점령했으나 조선 해군과의 직접적인 해전은 피했습니다.


            4월 30일,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이 일본군에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받았고, 이에 5월 4일 이순신은 85척의 함대를 이끌고 첫 출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함대에는 판옥선, 협선, 포작선이 포함되었습니다. 이어서 옥포해전, 합포해전, 적진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이 과정에서 일본 해군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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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장군의 주요해전도, 참조: 두산백과] 


            이순신은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이억기에게 좌수영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5월 말, 원균으로부터 일본 함대가 사천과 곤양 지역으로 압박해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이순신은 노량으로 출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에서 승리를 이어갔고, 이순신 함대는 일본 함대를 격파하고 주력함 아타케를 포함한 여러 함선을 파괴했습니다.


            이순신의 2차 출전은 전력상의 우위를 확보하고 일본 해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율포해전이 발생했고, 여기서도 이순신 함대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전투들을 통해 이순신은 자헌대부로 승격되었고, 원균과 이억기도 포상을 받았습니다.



            한산도 해전


            임진왜란 중 연속적인 해전 패배 후 일본은 수군장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에게 조선 해군과의 결전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6월 2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해군을 제거하고 보급로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준비를 마친 와키자카는 구키와 가토가 준비 중일 때 단독으로 출전했으며, 그의 함대는 대규모였습니다.


            조선 해군은 2차 출전을 마치고 다음 전쟁을 준비하던 중, 가덕과 거제에 일본 함대가 출몰한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이에 7월 4일 이억기의 함대와 좌수영에서 합류한 후, 7월 6일 3차 출전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노량에 도착해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고, 진주 창신도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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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수하루, 사진: historymap, wikipedia]  



            7월 7일, 연합 함대는 견내량에 있는 일본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했습니다. 견내량은 수심이 얕고 암초가 많아 해전에 부적합했습니다. 이순신은 와키사카 함대를 유인해 넓은 바다로 이끌었습니다.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 함대를 포위해 대규모 승리를 거두었으며, 와키사카는 겨우 탈출했지만 많은 일본 장수가 전사하거나 자결했습니다.

            7월 9일, 안골포에 있던 일본 함대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고, 이순신 함대는 공격을 준비했습니다. 일본 함대는 해전을 회피했지만, 이순신은 포구에 정박해 있던 일본 군선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한산도 해전은 임진왜란의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해전의 승리는 조선에 제해권을 가져다주었고, 일본군의 전략을 변경시켰습니다. 이 해전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승승장구를 가능하게 했으며, 전라도와 충청도의 보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한산대첩의 의의


            한산대첩에서 조선 수군이 승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조선 수군은 해전 전에 미륵도 목자 김천손으로부터 중요한 적정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이 정보는 조선 수군이 적의 위치와 상태를 미리 알고 전략을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은 전투 환경을 면밀히 분석하여 조선 수군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학익진과 장사진 같은 전술적인 진형을 사용하여 적을 효과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이러한 전략은 전투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데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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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옥선(板屋船)묘사도, 사진: 우리역사넷] 


            더욱이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거북선 같은 우수한 함선과 화포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우수한 무기체계는 일본군을 압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조선 수군의 강력한 함대와 무기는 일본 수군이 경쟁할 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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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마다 달랐던 거북선의 구조, 출처: 정신술 논문] 


            http://www.theoceandiscourse.com/download/2020_06/OceanDiscourse-2020_06_07.pdf


            김재근(金在瑾)의 저서 "조선왕조 군함 연구(朝鮮王朝軍船硏究)" (서울: 일조각, 1977년, 1991년 재판) 127쪽에 따르면, 1815년과 1845년에 작성된 '호좌수영지'에서 거북선(龜船)의 인원 구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선직(船直) 1명과 사공 8명이 탑승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8명의 사공에는 무상(舞帆, 돛을 다루는 사람), 타공(打工, 배를 노로 젓는 사람), 요수(搖手, 노를 젓는 사람), 정수(整手, 배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람)가 각각 2명씩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추정은 1716년 '각군선제정액수(各軍船制定額數)'라는 문서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거북선에는 범주(船具, 배의 장비)를 작동하는 요수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통해 전라좌수영귀선도에 원래 범주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정진술. (2020). 임진왜란기 거북선의 구조와 전술. 해양담론, 7, 108-130.


            한산도해전과 안골포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이끄는 정예군을 연파했습니다. 이는 일본 수군에 큰 타격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일본 수군은 더 이상 조선과의 해전을 시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승리는 조선의 해상 지배력을 강화시켰고, 일본군의 북진을 좌절시켰습니다.

            결국, 이 승리는 단순한 해전의 승리를 넘어서 임진왜란의 전황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 수군의 이러한 성공은 일본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이 해전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해전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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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골포에서는 이순신해전 축제가 열리네요. 사진: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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