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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의 이해 4] 고대의 항해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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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60회 작성일 23-10-1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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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현대사, 사진:飛飛歷史網] 


            정방향 대양항해술의 사례는 역사적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5세기 초에 중국의 승려 법현(法顯)이 인도에서 귀국할 때 사자국(獅子國) 곧 지금의 스리랑카에서 정동쪽으로 수마트라까지 항해하였고, 

            또 일본의 입당구법승 엔닌이 본국으로 귀국하기 위하여 839년에 중국 강소성 해주 동해현에서 정동쪽인 한반도 서남쪽의 흑산도 방향으로 항해하였던 사례가 그것이다. 



            셋째는 자연 현상을 이용한 항해술이다. 원시항해술시대에 선박이 목적지 부근 해역에 가까워질 무렵이면 선원들이 육지나 도서의 존재 유무를 확인하는 것은 성공적인 항해를 위하여 어떤 방법으로든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작업이었다. 

            선박의 안전에 위험이 되는 요소가 대양을 항해할 때보다는 오히려 육지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육지가 가까워졌다고 추측되면 온갖 자연 현상을 이용하여 육지나 도서를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이 이때 시도한 구체적인 항해 방법은 물빛을 보고 육지에 가까워진 것을 짐작하는 것이었다. 본래 바닷물의 색깔은 깊은 대양에서는 검푸른 빛을 내며, 육지 가까이 수심이 낮은 곳에서는 녹색 또는 황색 빛을 낸다. 



            1488년에 제주해협에서 조난당하여 29일간을 표류하다 중국 절강성 해안에 표착한 최부(崔溥)는 표류 중 바닷물 색깔의 변화를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는데, 짙푸른 색에서 백색, 청색, 적색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바닷물 색깔의 변화는 고대의 유능한 선원들에게 중요한 항해 정보였고, 청색이나 적색이 보이면 육지를 발견하기 위하여 주야를 불문하고 돛대 위에 감시자를 배치하였다. 또한 이렇게 바닷물의 색깔이 변화하면, 

            선원들은 수심을 측정하여 암초나 수심이 낮은 곳에 좌초되지 않도록 조심하였으며, 때로는 해저의 토양을 채취하여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그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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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남표해록, 사진:경향신문] 


            최부(崔溥, 1454~1504) 


            1482년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곧 교서관저작·박사, 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 서거정(徐居正) 등과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 그 속의 논(論) 120편의 집필을 담당했는데, 

            그 논지가 명백하고 정확하다 하여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을 완성하는 단계에서 참여하였다.

             이 해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했으며, 이어 홍문관교리로 임명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1487년제주 등 3읍의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임명되어 제주로 건너갔는데, 

            거기에서 다음 해 초에 부친상의 기별을 받고 곧 고향으로 급히 오는 도중에 풍랑을 만났다. 

            이에 43인이 탄 배는 14일 동안 동지나해를 표류하다가 해적선을 만나 물건을 빼앗기는 등 곤욕을 치르고 

            결국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台州府臨海縣)에 도착하였다. 처음 왜구로 오인되어 몰살당할 뻔했으나 어둠을 이용, 

            빠져나와 조선 관원이라는 것을 간신히 승복시켜 일행은 북경으로 보내졌다가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그는 상신(喪身)으로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복을 벗을 수 없다고 고집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유가의 예와 윤리의 원칙에 대한 타협을 거부하였다. 

            그가 귀국하자 성종은 8,000리 길을 거쳐온 중국 땅에서의 견문을 기술하여 바치도록 명하였다.

             이에 그는 남대문 밖에서 8일간 머무르면서 기술했는데 이것이 『금남표해록(錦南漂海錄)』 3권이다. 

            그리고 곧 고향으로 달려가 여막을 지키다가 또 다시 모친상을 당하여 다시 삼년상을 지냈다.

            1491년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사헌부에서 서경(署經)을 거부하여 1년 후에 홍문관교리로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말썽이 많아 결국 승문원교리로서 낙착되고 말았다.

             말썽의 골자는 친상을 당한 그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로 곧장 고향으로 달려가야 할 것인데도, 

            아무리 군명(君命)이라 할지라도 한가하게 기행문이나 쓰고 있었던 것은 도리에 어긋나기 때문에

             관직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로 찬성과 반대가 들끓었는데, 성종의 두호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명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것은 사헌부·사간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행정부 및 홍문관의 세력과 대립한 데에서 빚어진 바 컸다. 

            그 뒤 그는 연산군 때 일찍이 중국에서 배워온 수차(水車) 제도를 관개(灌漑)에 응용하는 시도도 했고,

             또 질정관(質正官)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연산군의 잘못을 극간(極諫)하고 공경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하다가 무오사화 때 화를 입어

             함경도 단천으로 귀양갔으며 여기서 6년을 지내다 갑자사화 때 처형되었다.

             그의 표류기는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널리 읽혀졌다.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에 여러 가지 판본과 사본이 통용되고 있었으며, 일본어 번역본까지 나왔는데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라는 이름으로 1769년(영조 45)에 간행되었다. 시호는 충열(忠烈)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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