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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의 이해 6] 교역항의 개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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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95회 작성일 23-10-11 16:06

            본문

            교역항의 개발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교역항 역할을 했던 곳을 살펴보겠습니다.



            1.  대동강·압록강 유역


            위만조선과 낙랑군 시대에 대동강 유역에 교역항이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이 평양 지역에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변진(弁辰)에서 생산되는 철이 해로를 통하여 낙랑·대방군에 공급되었다. 또 낙랑의 목곽분이 양자강 지방의 한대(漢代) 목곽분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고, 더욱이 중국 강남산 관재(棺材)가 낙랑으로 교역되었다. 


            뿐만 아니라 낙랑의 칠기들이 양자강 중상류 지역에서 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낙랑과 양자강 지방간에 해로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유적을 보더라도 평양시 대동강 남쪽에는 낙랑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수천 기의 고분이 산재해 있고, 그 중심부에 낙랑군의 치소(治所)로 이해되는 낙랑토성이 대동강과 북접하여 있다.


             낙랑토성은 당시 해상 교통 의 요지에 위치한 것이다. 20세기 초까지도 대동강과 접하는 토성 북벽에 선착장이 있 었던 것으로 보아 원래 낙랑토성 지역에도 교역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후 한말 공손강(公孫康, 204〜221)에 의해 황해도 재령강 유역의 사리원 부근에 대방군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대동강의 지류인 재령강 유역에도 대방군의 교역항이 개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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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토성, 사진: 나무위키]


            고구려의 성장 발전에 따라 압록강 하구에도 교역항이 개발되었다. 고구려는 233년에 오나라와 처음 교섭한 이래 동진을 비롯한 남조 여러 나라들과 해로를 통하여 교섭 하였으며, 그 교섭의 창구는 안평구(安平口)로 곧 압록강 하구였다. 

            고구려에게 압록강 하구는 해양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낙랑·대방군과 그 본국인 한 나라 요동 지역과의 육로를 통제할 수 있고, 또 서해로 진출하여 연안 여러 나라 특히 중국과 해상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146년에 한나라 요동 군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은 바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때쯤에는 고구려 선박이 압록강 하구를 자유롭게 운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고구려는 242년에도 서안평을 공격한 바 있으나 그곳을 완전히 점령 한 것은 311년(미천왕 12)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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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천왕, 사진: 매경프리미엄]​


            고구려가 서안평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미 3세기부터 압록강 하구를 경유하여 중국의 남조 여러 나라들과 해로를 통하여 자유롭게 교류하였다는 것은 이 곳에 고구려 군 사력으로 보호되는 교역항이 유지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교역항은 박작구(泊灼口)로 추정되며, 지금의 애하靉河 하구와 압록강이 만나는 곳에 그 유적인 박작성이 있다. 『구당서』 서만철(薛萬撤) 열전에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압록 강으로 들어와 박작성을 공격하였다고 했다. 


            또 가탐(賈耽, 730〜805)의 『도리기道里記』 에 발해로 들어가는 항로는 압록강 입구에서 선박으로 백삼십 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에 이른다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박작구는 고구려의 교역항이었던 것 같다. 박 작구는 고구려가 수도를 국내성 지역에 두고 있었을 때 주요 교역항으로 그 기능을 계 속 발휘하였을 것이며,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낙랑군과 대방군이 이용하였던 대동강 포구를 주요 교역항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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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군과 대방군, 사진: 스카이 데일리] 



            2. 예성강 유역·황해도 남안 


            낙랑군 시대에 예성강 유역과 황해도 남안에 교역항이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진한의 염사치(廉斯鑡)가 함자현(含資縣, 지금의 황해도 서흥군)에 가서 낙랑에 투항하였는데, 

            낙랑은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큰 선박을 보내 진한에 잡혀가 있던 낙랑인들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함자현의 위치가 예성강 상류인 황해도 서흥인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낙랑의 큰 선박이 출항하였던 곳은 예성강 하류였을 것이다. 

            3세기 초에 황해 도 사리원 부근에 대방군이 설치되었는데,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대방군은 허약해진 낙랑 군의 기능을 보완하고, 남쪽의 한국과 왜를 복속시키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한을 비롯한 한반도 남부 지방의 여러 소국은 물론이며 왜인들도 해로를 통하여 대방군 과 빈번하게 교섭하였고, 이때 그 교섭의 통로로서 예성강의 포구가 이용되었을 것이다. 황해도 해주시 용당포(龍塘浦)에 고구려의 포구가 개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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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해주, 사진: 매일경제] 



            용당포 동북방 인근에는 고구려의 이 지역 해안 방어성 역할을 맡았던 수양산성이 있다. 수양 산성에서 북쪽으로 30km 거리인 황해도 신원군 아양리에는 고구려 장수산성이 있으며, 

            산성 아래의 아양리와 월당리에서 고구려의 대규모 건축 유적이 발견되었고, 주변 일대에는 1,000여 기의 고구려 무덤들이 있다. 


            아양리 일대를 백제의 초기 왕도로 보는 주장도 있으나, 북한학계에서는 평양, 부여, 경주를 제외하고 삼국시대 유적으로서는 가장 크다고 하며,

            장수산성과 아양리·월당리의 토성 그리고 도시 유적을 포괄하여 4세기 고구려의 ‘남평양’으로 주장하고 있다.



            3. 한강 유역


            한성시대 백제의 도성인 하남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몽촌토성, 풍납토성, 교산동토성, 하남시 춘궁동 등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이 유적들은 현재 서울시 송파구, 강동구, 하남시 등에 위치하나 조선시대에는 모두 광주목(廣州牧) 관하로서, 한성시대에 인구 밀집 지역이었다. 

            이들 유적 가운데 백제의 교역항으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지역을 들 수 있다. 두 토성 사이에 성내천이 흐르고, 토성들의 서벽은 본래 한강과 접해 있었던 것으로 볼 때, 

            이곳은 한성시대 백제의 해상 교통의 요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이 부근의 교역항으로 혜포(鞋浦)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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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촌토성, 사진: 송파구청] 



            혜포는 661년에 당나라가 신라와 협동하여 고구려를 쳤을 때, 백제 유진장(留鎭將)이던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군사들과 함께 사비 부여에서 선박으로 출발하여 남천주(南川州, 지금의 경기도 이천군)에 주둔하기 위하여 상륙하였던 곳이다. 

            당시 신라군의 북진 경로가 충주-장호원-이천-광주-서울로 이어졌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유인원이 상륙하였던 혜포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인근이었을 것이다.



            4. 경기만 지역


            인천시 영종도는 초기 철기시대(BC 300〜0) 및 원삼국시대(0〜300)에 서해안 연안항로의 거점이자 국제 교역항이었다. 

            최근에 영종도 북동쪽 해안가인 운북동 유적에서 오수전(五銖錢) 17점을 비롯하여 낙랑식 화살촉 22점과 낙랑계 토기편들이 발견됨으로써, 이곳이 당시에 국제 교역항으로 이용되었음이 밝혀졌다. 


            오수전은 중국에서 BC 118년에 주조가 시작되어 수나라 때까지 제작되었으며, 한국과 일본 등지에서 발견되는 국제적인 화폐로 남해안 여러 곳에서 출토된 바가 있다. 

            인천은 미추홀이며 백제 초기에 비류(沸流)가 도읍하였던 곳이므로 백제도 이곳에 교역을 위한 포구를 운영하였을 것이다. 


            시기는 늦지만 18세기의 문헌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인천부의 대진(大津)이 중국으로 가는 백제 사신의 발선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대진은 한진(漢津)으로도 표기되며, 그 위치는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의 능허대공원 주변으로 현재는 육지화 되었다. 백제가 인천의 대진을 통하여 중국에 사신선을 보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대진이 비류 등 백제 관련 전승과 유적이 밀집되어 있는 문학산과 지근거리에 위치하고 또 영종도에 인접한 것으로 볼 때, 한성시대에 중국 으로 가는 백제의 사신선이 여기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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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지도서, 사진:서울대학교]


            당은포(唐恩浦, 지금의 경기도 화성)는 6세기에 신라의 대당(對唐 교역항으로 처음 개발되 었다. 553년(진흥왕 14)에 신라가 백제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아 서해를 통하여 중국과 교섭할 수 있는 항구를 개척하였는데 바로 당은포였다. 

            이후 당은포는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교역항으로 운영되다가 나말려초에 이르러 예성항에 그 지위를 물려주었다. 


            당은포는 8세기 말 가탐의 『도리기』에 ‘등주해행입고려발해도(登州海行入高麗渤海道’의 신라 방면 종착항으로서 당나라 사신선이 여기에서 상륙하여 왕성(경주)으로 향했던 곳이다. 

            간혹 당항성(黨項城)을 한성시대 백제의 교역항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당항성은 시 대에 따라 당성진(唐城鎭, 고당성(古唐城), 당성(唐城) 등으로도 불렸는데, 지금의 명칭은 당성이며,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에 위치한다.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당성 부근에 중국과 교통할 수 있는 포구를 개설하였는데 당항진(黨項津) 곧 당은포였다.

            한성 시대 백제는 인천과 강화도 등 한강 하구 유역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향하는 사신선을 굳이 인천보다 훨씬 아래쪽인 당은포에서 출발시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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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성 당성, 고대 황해를 주름잡던 요충지, 사진:인천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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