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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도 탐구] 이어도와 인공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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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댓글 0건 조회 1,190회 작성일 23-10-13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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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도탐구, 오늘은 <이어도 오디세이>에 수록된 이어도를 인공섬으로 만들려했던 일제 강점기 시대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어도에 인공섬을 짓는다?



            섬나라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해양 진출에 적극 나섰다. 일본 제국 해군은 20세기 들어 영해뿐 아니라 한반도 일대와 중국 연해까지 활동 영역으로 삼았다. 1945년 패전 이후 해양 강국으로 부활한 일본은 이어도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주목할 만한 대목은 일본이 이어도를 인공섬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다. 인공섬 조성 계획은 전쟁 역사에 묻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관련 학자들의 꾸준한 발굴로 그 전모가 드러났다.

            일본에서 중국에 이르는 항로에서 암초를 확인했다는 영국의 항행통보를 받은 일본은 1901년 8월 16일 자 수로 고시 제1250호에 ‘위험한 암초험초(險礁) 발견’ 사실을 게시했다. 고시 내용은 상세하다.


            북위 32도 7분 15초, 동경 125도 11분 자리에 바다 밑에서 험하게 솟아오 른 화산 모양 참암(尖岩) 정상에 석화점 초탄(石花點礁灘)이 있고, 그 북동에서 남서에 이르는 길이 약 4분의 1해리, 폭 약 60야드, 그리고 가장 얕은 쪽이 18척이면서도 언제나 더 얕은 부분이 존재한다. 

            이탄(灘, 여울)의 남서 끝에서 암파(岩坡,바위언덕)가 남서 조금 남쪽 방향으로 반해리에 걸쳐 뻗는다.그 가장 얕은 부분은17심이다.이 여울 위로 격렬한 단조(湍潮,급류)와 격단(激湍)이 있고, 북동으로 약 반해리,남서로1해리를 뻗는다. 

            가장 얕은 곳은 이 여울의 양끝이라 생각된다. 그 북동 끝에서는 꺾이는 파랑(波浪)이 보인다. 해수가 질료(疾流)할 때는 여울 위의 한 면에 파랑이 일어난다. 

            급류는 1해리 이상 떨어져서도 볼 수 있으며, 태양을 등지고 있을 때는 이 여울 위에 엷은 박록수(薄綠水, 초록빛 물)가 있음을 같은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다. 

            이 여울 주위의 바위 언덕은 확연한 곳을 제외한다면, 약 4분의 1 해리 거리이며, 그 사이의 수심은 27심에서 30심에 이르는 사니(沙泥, 모레진흙)다. 

            그러므로 해저가 화산암과 회진(灰塵), 화석화(懷石花)로 이루어진 곳까지 닻을 내리는 것은 불가하다. 이 석화점탄(石花點灘)은 1868년 보고된 코스타리카호의 파랑초(破浪礁),1900년 6월 소코트라호와 같은 해 9월 추엔호의 천탄(淺灘, 얕은 여울), 

            같은 해 10월 보무베호의 변색수(變色水, 빛깔이 다른 물)와 다분히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조류는 이 바위 위와 부근에서 강하게 흐른다. 그리고 회전을 한다. 워터 위치호가 여기에 접근했을 때는 조류가 1시간 2절의 속도를 보이면서, 남쪽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일본의 1901년 8월 16일자< 수로고시 제1250호> 고시내용 

            항행통보를 통해 이어도 위치를 확인한 일본이 자국 해군 수로국 측량선을 보내 직접 확인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수로 고시 내용이 워터 위치호의 보고와 일치한 것으로 보아 당시 탐사는 이뤄지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 같은 해에 소코트라호에 이어 두 척의 배가 더 암초 신고를 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영국 해군이 통보한 암초를 자신들이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던 이어도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수로 고시에서 ‘위험한 암초’라고 지칭한 데 이어 해도 제1002호엔 ‘하로스’라고 명시했다. 

            이어도에 대해 명료한 인식을 갖게 됐다고 할 수 있다. 이후 30여 년간 이어도는 특별한 관심을 받지 못했다. 이어도가 재평가된 것은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꿈꾼 일본은 동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까지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본과 중국 본토를 잇는 해저통신선이 절실해졌으며, 그 경로로 나가사키에서 제주도를 거쳐 상하이를 잇는 코스가 유력하게 검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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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저케이블 예시-중국 해저 케이블 투자가 사이버 보안에 미치는 영향, 사진:jsis.washington.edu]


            그중 나가사키~제주도 코스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제주도~상하이 코스는 너무 길어 중간 기착지가 필요했다. 이어도에 대해 알고 있던 일본 기술자들은 이 암초를 중계기지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해저케이블 중계 시설과 함께 등대를 설치하자는 구상이었다. 

            이어도가 육양(陸揚), 즉 해저케이블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지점이 되는 셈이다. 등대가 세워지면 이어도 수면 위로 지름 15m, 높이 35m에 이르 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올라앉게 된다.

            이어도를 인공섬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계획은 구체적으로 추진되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무산됐다. 하지만 항해의 장애물일 뿐이었던 이어도에 대한 최초의 지정학적 가치 평가, 실질적 활용 방안이란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35m 높이 등대가 세워졌다면


            일본전신 전화공사는 1938년 초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 본토와 상하이, 상하이에서 대만으로 이어지는 해저 통신선 가설 임무를 부여받았다. 중일전쟁에 따른 군사 목적이었으므로 시급히 시행해야 할 사업이었다.

            1870년대 설립된 공사는 제국 시대 일본의 통신선을 깔아온 국책회사였다. 해저케이블 포설(鋪設) 기술을 보유한 유일한 회사로서 정부 통제 아래 있었으며, 훗날 합병을 통해 국제전통신주식회사가 됐다.


            이어도의 인공섬 조성계획은 나가사키 항에 있는 이 회사 사료관 자료와 《일본전신전화공사 100년사》에 실려 있다. 해저 통신선 계획은 일본 본토에서 상하이까지를 1기로, 상하이에서 대만까지를 2기로 나눴다. 

            여러 루트를 검토했으나 동중국해를 가로질러 해저 케이블을 포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해저선 시설 사무소 루트 측량 조사단은 1938년 7월부터 2달간 나가사키부 터 후쿠에지마(福江島), 제주도, 화조산도(花鳥山島), 상하이, 대만까지 총 2,000km를 탐사했다.



            그 결과 육양지(陸揚地) 선정이 핵심 과제로 떠올랐다. 상하이 양쯔강 하구와 일본 본토 사이에서 이용 가능한 섬은 제주도뿐이었다. 그런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중계시설이 꼭 필요했다. 

            육양지는 케이블이 직선으로 연결된 최단거리 중 해저 지질이 나쁘거나 수심 변화가 급격한 곳은 피해야 했는데, 당시 기술로는 수압 등의 문제로 수심 300m가 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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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지마(出島)는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상관으로 대여한 인공섬이다. 

            4000평 정도의 부채꼴 모습을 했는데 메이지유신 후 항만건설로 철거됐다가 1990년대 나가사키시에서 관광목적으로 일부 복원했다고 한다. [출처: worldkorean]



            그러던 중 중계기지 후보지로 제주도 남쪽 상하이 방향 90해리 지점의 이어도가 거론됐다. 대양 한가운데 등대 형태의 육양탑을 축조한다는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제주도와 상하이 앞 화조산도가 454 ㎞인데 이어도에 중계소를 지으면 제주도에서 이어도 구간이 162 ㎞, 이어도와 화조산도 구간이 276㎞가 된다. 

            일본-상하이 간 항로상 경계 지점이므로 육양탑에 등대 설비를 하면 항행 안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봤다.


            중계기지는 해류압, 풍압, 파도의 충격을 감안해 단단한 원통형 케이슨(콘크리트 구조물)을 입체적으로 겹쳐 수면 위 35m 높이로 구 축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나가사키에서 케이슨을 제작한 뒤 현장으 로 예인하기로 했다. 

            탑 상부에는 수밀문(水密門)을 단 3단 방을 설치해 해저케이블 육양실, 전화중계기실, 등대실로 쓰기로 했다. 높이 20m까지 파도에 휩싸일 것을 예상해 20~35m에 시설을 두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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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키노토리시마 암초, 일본이 자국 최남단의 섬이라고 주장하는 작은 암초로 일본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쿄도 오가사와라촌 소속으로 되어 있고 도쿄에서 약 1,740 km 떨어져 있다. 사진:한국일보]



            일본은 일찍이 서양의 등대 건설기술을 수입해 경험을 축적해 왔으며, 대만과 조선 주요 해안에 다수의 등대를 건설·관리해왔다. 이 계획안에는 구체적인 제작·설치 공정과 소요 예산까지 포함돼 있다. 

            탑 구축을 위해 필요한 장비와 인력은 물론 잠수작업, 창고, 임시막사, 계원간 신호방식까지 상세히 준비했다. 공기는 3년으로 설정했다. 태풍, 계절풍 등의 영향으로 연중 5개월만 공사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육

            양탑 설립비용은 케이블 설비비를 빼고 총 160만 4,000엔으로 추산했다. 2022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931만 250달러, 한화 121억 8,000만 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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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구상했던 소코트라 암초 위의 육양탑 모형(일본전신전화공사 소장자료)] 



            1938년 착수한 나가사키와 상하이 간 해저통신선 가설 계획은 예정 루트 선정과 포설할 전선 실험 등을 거쳐 이듬해 확정됐다. 그런데 전선과 케이스 제작에 들어가려는 순간 문제가 생겼다. 일본은 당시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태평양 요처인 사이판, 티니안, 얍, 팔라우, 마셜 등 남양군도 각 섬을 잇는 해저 통신선 건설이 시급했기에 해저선 포설 공사 선박과 기술자들이 이 지역에 집중 파견되어 나가 있었던 것이다. 비용도 문제였다. 

            해저선 장거리 포설은 일반 전선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드는데, 특별예산 배정이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1941년 개전하면서 나가사키-상하이 간 해저선 가설 사업은 중단 됐다.


            해저케이블은 1930년대 동아시아 전역을 연결하는 일본의 거대 통신망 확장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중 나가사키-상하이 간 해저통신선은 이른바 ‘대동아 통신망’의 핵심이었다. 

            19세기 말 대만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 제국은 1910년 조선을, 1914년에는 남양군도를 강점했다. 1930년 만주국을 건설한 이후 일제 지배세력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까지 지배하에 넣으려 했는데, 

            광역 통신망은 무력으로 점령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기반 인프라 사업이었다. 패전 이후 해저통신망 사업은 국제전기통신주식회사에 인계됐지만 더 이상 추진할 수 없었고, 이어도 중계기지 계획도 잊혔다.



            만약 이 사업이 조금 일찍 시작되어 이어도에 35m 높이의 육양탑 겸 등대가 세워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한국이 해양과학기지를 짓기 60년 전 일본이 건설한 인공섬 시설이 이어도를 차지할 뻔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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