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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의 이해 3] 주형토기로 본 삼국시대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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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50회 작성일 23-10-0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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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형토기로 본 삼국시대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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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4]는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5세기경 신라의 주형토기이다. 선박 발달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이 토기들의 구조는 여타의 주형토기들과 세 가지 점에서 다르다. 

            첫째는 이 토기들에는 노질할 때 지렛대의 지점 역할을 해주는 놋거치대(pin, 노지점(櫓支點), 지렛목)이 없다. 

            둘째는 선수·선미가 협소하다. 셋째는 여타의 주형토기들이 통나무배의 좌우 뱃전에 보조판자를 붙여 선수와 선미를 마치 사다리 모양으로 추켜세운 것에 반하여, 

            이 토기들은 통나무배 그대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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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5]는 가야 지역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여지는 5~6세기의 주형토기이다. 이 토기는 '놋거치대'가 12개나 있는 대형 목선의 모습을 띠고 있다. 

            용골(keel)과 비슷한 모양의 선저는 앞뒤가 뾰족한 유선형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이러한 선저 구조는 물의 저항을 줄이고 무게 중심을 낮추어 안전하게 항해하기 위한 것이며, 

            이와 비슷한 것이 일본의 나가하라(長原)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선수·선미의 네 모서리에 비스듬히 추켜세워진 구조물은 밧줄을 걸어 육지와 연결시키기 위한 설비이다.

             뱃전 위에 설치된 놋거치대의 숫자와 선체 내부에 보이는 2개의 횡강력재(橫强力材)의 숫자가 서로 다른 것은 이 선박의 노잡이들이 노를 앉아서 젓지 않고 서서 저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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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6]은 놋거치대가 6개 달린 주형토기로 앞의 주형토기에 비해서 그 수량이 절반에 불과하다. 이것은 선박의 길이가 그만큼 짧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양쪽에 주둥이가 열려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형태는 선체 구조상 이해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 토기가 분묘에 부장되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죽은 자의 영혼이 저승으로 향하는 머나먼 여정에서 선박을 타고 가면서 동시에 술도 한잔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제작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 토기는 고고학적으로 5~6세기의 가야토기로 편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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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7]은 선수·선미가 쉽게 구별되는 구조이며, 선체 외판에 수레바퀴가 달려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그런데 선수 아래에 움푹 패여 뾰족하게 앞으로 나와 있는 부분 때문에 이러한 모습의 선박으로 항해한다면 침수가 잘 되어 빨리 침몰할 것이다. 

            그러나 이 주형토기는 고분 부장품으로서 죽은 이의 영혼을 위한 수레이자 선박이며 술잔의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영혼이 이것을 타고 저승으로 갈 때 강과 바다는 선박으로 건너고 육지는 수레를 타고 가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박의 원래 모습에는 선수의 뾰족한 부분이 없었을 것이다.


            ​이 선박은 선저가 둥근 것으로 보아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좌우 뱃전에는 판자로 외판이 올려붙여져 있으며, 그 위에는 파랑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선수에는 각각 1개씩 모두 2개의 놋거치대이 좌우 뱃전에 설치되어 있다.


            이 선박은 여러 주형토기선 가운데 선수·선미가 가장 확실하게 구별되는 것이며, 선미가 낮고 선수가 높이 솟아올라 있는 것으로 보아 주형토기선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이다. 

            또한 선수 구조로 보아 적어도 1개 이상의 판자를 올려붙여 뱃전이 만들어졌다. 

            이 선박은 높은 선수 구조와 파랑막이 뱃전 구조로 보아 항양선(航洋船)으로 짐작되는 데, 2개의 놋거치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는 2개만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처럼 적은 수의 노로 낼 수 있는 추진력은 대양을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 약하다. 따라서 필수적으로 돛을 겸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주형토기는 통나무배로부터 구조선으로 발전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현존하는 주형토기 가운데 선체 상부 구조가 가장 진보된 모형이다. 

            고고학적으로 4~5세기의 가야토기로 편년되는 이 주형토기는 당대의 선박 구조에 관한 중요한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주형토기들을 중요한 것만 골라서 살펴보았다. 

            고대사회에서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하여 무덤 속에 선박이나 선박의 모형을 부장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널리 행하여진 장례 풍습이었다. 

            이 풍습은 4~6세기에 고대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도 행하여졌다. 그 시대의 무덤에서 출토된 주형토기들은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선박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선박에 대한 문헌 자료가 빈약한 실정에서 이들 주형토기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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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형토기선의 선체 구조는 하부 구조가 대부분이 통나무배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체 구조적 특징만으로 보면 주형토기선들은 [표 1]과 같이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토기사(土器史)를 무시하고 선박발달사적 측면만으로 볼 때 1부류에서 3부류로 즉 통나무배에서 준 구조선으로 발전되었음을 보여준다. 

            현존하는 자료로 보 았을 때, 주형토기선의 시대는 우리 민족의 조선술이 통나무배나 뗏목배에서 구조선으로 이행되어 가는 과도기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주형토기선은 대부분 강이나 만(灣) 내에서 사용될 수 있는 선박의 모습이다. 

            다만 [그림 17]은 선수 구조가 고대(高大)하여 대양의 파도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항양선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며, 

            [그림 15]도 선저의 구조가 유선형이고 노의 숫자가 많은 것으로 볼 때 역시 항양선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주형토기선의 실제 크기는 어느 정도였을까? [그림 15]와 같이 노를 12개 가진 주형토기선을 실물로 복원할 경우에 놋거치대의 간격을 보편적인 90센티미터로 가정하면, 

            선박의 길이는 최소한 8미터 이상이 된다. 한편, [그림 15]의 승조원은 놋거치대의 숫자로 보건대 노잡이 12명과 조타수 2명으로 최소한 14명 이상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16]처럼 노가 6개 달린 선박은 인원이 그 절반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삼국시대 선박이 모두 주형토기선처럼 작은 규모였다고 볼 수는 없다. 

            고구려와 백제가 이미 3~4세기부터 서해 연안을 따라 멀리 중국 남조(南朝)와 교섭하고, 

            광개토왕이 대규모의 수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한 것은 상당한 규모의 선박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타고 왔던 선박은 뱃사공 15명과 공주 일행 20여 명 등 도합 35명이 승선하였으며, 

            이것으로 미루어 수로 왕대 가락국 무역선의 규모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뒤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조선술도 5세기경에는 상당히 진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 오우진(應神) 31년에 무고수문(武庫水門)에 모여 있던 왜국의 많은 선박들이 신라 사신의 실수로 불타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신라는 뛰어난 장인들을 보내 다시 건조해 준 적이 있었다. 이것은 5세기 경의 사실로서 당시에 신라의 조선술이 선박 기술자를 왜국에 보낼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의 문화가 발달되고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술도 더욱 발전하였다. 예컨대, 왜국이 백제선 2척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3년 뒤인 653년(의자왕 13)에 완성하였다. 

            또 676년에 신라 수군은 기벌포해전에서 승리하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낸 적도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삼국시대 말기에 이르면 우리 민족의 조선술이 상당히 발전하여 대형선을 건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의자왕은 백제의 마지막 왕으로 삼국사기 28권과 삼국유사 34장에 언급된다. 두 책 모두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부상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660년에 패했고 승자인 신라는 이 이야기를 고려의 궁정 학자들에게 전달해 결국 이들이 1145년에 삼국사기를 집필하고 1200년대에는 삼국유사가 집필된다. 

            당연히 친신라적인 이 이야기들 속에서 의자왕은 상당히 형편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사실 신라에게도 적수는 물리칠만한 상대여야 했기 때문에 그리 형편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히 형편없게 여겨졌다. 삼국유사는 귀신과 도깨비, 악귀 심지어 악한 백여우까지 등장하는 전조와 예언에 대해 놀라운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이들은 의자왕의 몰락과 관련된 것이다. 

            모두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멋진 이야기들이다.


            가장 결정적이었던 마지막 전투는 백제와 신라간 황산벌 전투(黃山─ 戰鬪)에서의 패배였다. 전투 부지는 오늘날 대전의 남서쪽인 충청남도 논산시 부근이다. 

            이 전투에서 백제의 계백 장군(사망: 660년)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595~673년)에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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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항해의 이해 3] 주형토기로 본 삼국시대 선박|작성자 ieodoresearch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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